한동안 조용한가 싶더니 기껏 익힌 기술로 상대를 깎아내리는 영상을 제작한 어떤 정치인 소식을 접한 하루에 단비같은 필사였네요.

# 그래도 너무 필사적(必死的)이지 않게
실패도 해 본 사람이 해보는거라고. 새로운 시작도 일단 시작을 해 본 사람이 할 수 있는거라고. 그렇게 위안삼으며 ‘클럽창비’의 필사살롱을 핑계로 또 다시 필사라는 영역에 한 손을 들이밀어 봅니다. 인생 뭐 있나요. 그렇게 끊임없이 시도하고 결과를 받아들이고 또 다음을 살아가고 그런게 인생 아닐까요. 거창하게 인생까지 거론하긴 했지만 ’클럽창비‘의 ‘느슨하지만 함께 하는 책읽기‘라는 컨셉에 적극 찬동하면서!! 추억을 곱씹으며 시작해봅니다.
2018년 말 즈음인가부터 2022년 초반까지 여러 곳에다가 필사의 흔적들을 남겼더랬습니다. 단 한 개의 공책도 끝까지 마치지 못한 필사 공책들이 이렇게나 많네요. 이 외에도 백지 종이나 기억나지 않는 여기저기 많은 곳에다가 필사를 하거나 생각나는 것들을 쓰고 ‘오늘의 새김말’이라며 마음에 새기고 일기도 쓰고 했댔습니다.
입을 열기 전에 귀를
귀을 열기 전에 마음을
특히 마음에서 시작하라는 뜻으로 마음을 열고 귀를 열고 나서야 입을 열라는 이 말은 한동안 매일같이 쓰고 또 보면서 이루지 못할 꿈(?)을 꽤나 필사적으로 꾸기도 했습니다. 역시 무수히 많은 실패와 좌절을 하면서 내가 그럴 수 있는 그릇이 아니라는 걸 수도 없이 깨달으면서도 또 다시 그런 나를 끊임없이 상상하면서 시도합니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리스본행 야간열차>)이라는데 조금씩 가까워질거라는 믿음 하나로 말이죠. 하하하… 쓴다는 행위가 우리의 인식에 주는 영향이란 매우 강력하다는 데 반대할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그래서 필사도 하고 매일같이 몇 자라도 글을 쓰고 살펴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지금 제가 이 정도 살고 있다고, 이거라도 안 했으면 지금 나이가 더 부끄럽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시기였어서 그런건지 몰라도 나름 꾸준히 했던 필사 시즌1 의 중간 즈음인 2020년 3월에는 야심차게 일기장도 마련해서 매일같이 조금이라도 쓰려고 했었습니다. 역시 게으른 저는 어디 안가고 4년이 조금 넘은 2023년 6월이 되어서 마지막 장을 맞이했었지요. 그 일기장 사진은 꼭 일기여서만이 아니라 워낙 게으름의 증거물인지라 차마 사진으로도 내어놓기 부끄러워 감춰둬야지 싶네요. 그래도 <헤르만 헤세의 나무들>보다 조금 더 큰 무지 공책을 140쪽에서 딱 2쪽 부족한 138쪽 채워냈으니 양만으로도 꽤 성공적이지 않았나 정신승리 해봅니다.
도대체 필사 살롱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구구절절 실패담을 늘어놓는 이유가 뭘까요? 함께 시작한 필사 살롱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의 두근두근 쿵쿵할 살롱 분들 포함해서, 실패를 경험하고 있고 실패할 걱정에 시작하지 못할 많은 분들에게 작게나마 시작할 용기를 드리기 위해서? 그래도 이 정도는 써봤다는 걸 들춰냄으로서 나를 응원하기 위해서? 둘 다가 아닐까 싶네요. 제 마음대로지만 끝내지 못해도 괜찮아요. 그래도 시작했잖아요? 시작할 기회가 있잖아요? 실패의 경험이 있다면 우린 전문가가 되어가고 있는것이고 아직 실패 전이라면 전문가가 될 가능성이 남아있습니다. 아인슈타인과 맞짱떠서 양자역학이라는 분야를 일구어 낸 천재 과학자 닐스 보어가 그랬답니다.
전문가란 그 분야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실패를 다 해본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리고 필사를 시작하는 분들은 모두 필사 전문가를 향한 길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아니면 필사 전문가 지망생이거나 ㅋㅋㅋㅋ 그러니까 끝내지 못해도 괜찮…겠죠?

첫번째 사진의 작은 수첩의 마지막에 쓴 글귀를 보니 제가 줄어만 가는 제 삶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을 지려고 마음 먹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스스로 대견합니다. 그래도 너무 필사적이지 않게, 그렇게 필사해야 오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자기 자신이 되는 길
무려 10대에 자살을 시도했던 헤르만 헤세도 역시 실패를 통해 자기의 삶을 일구어 낸 사람이 아닌가 싶네요. <헤르만 헤세의 나무들>의 첫 글인 ’나무들(Baume)’은 헤르만 헤세가 ’자기 자신‘이 됨으로서 자신은 물론 타인을 넘어 우리 주변의 객체들에게까지 마음을 열었음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내가 되고 싶은 것은 바로 나 ’자기 자신‘이고 그럼으로서 고향과 행복을 찾았음을 선언했습니다. 그가 생애에 걸쳐 ’자신의 형태를 만들어내고 자신을 표현하는 일에 집중‘했음을,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이 세상 존재들은 ’모두 성소‘이며 ’신이 깃들어 있음‘을, 각자의 사유가 짧고 서두르지만 그것이 긴 호흡으로 자기의 고향을 찾아가는 과정이기에 ’기쁨‘이라는 것을, 나직하지만 무엇보다도 견고한 의지를 담아 ‘Bäume’을 통해 전달 받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나무 한 그루를 뜻하는 Baum이 아닌 나무들을 뜻하는 Bäume이라는 제목에서마저 그의 통찰과 깊이를 전달받은 것 같아 오늘밤 꿈은 든든할 것 같습니다.
이번 필사의 시작이 첫번째 사진의 필사 글귀처럼 인생의 얼굴을 점차적으로 아름답게 바꿔갈 습관이 되기를 응원하며 그림 한 조각 남기고 꿈자리에 가야겠습니다.

2025년 마곡 스페이스 K에서 2월까지 진행됐던 최민영 작가의 전시 <꿈을 빌려 드립니다>에서 꿈과 현실, 상상과 실제가 혼재하는 많은 작품들을 만났었는데요. 내 안에도 이렇게 많은 정보와 펭귄들을 어떻게 버무려서 나라는 ’사람‘을 구성하고 표현할까 새삼 생각하게 되는 필사의 하루였습니다. 인생이란, 우리가 산다고 상상하는 꿈이 바로 내가 만들어 가는 나의 삶, 그러니까 나의 고향인 것은 아닐까요? 알고보니 내 고향은 찾아갈 곳이 아니라 만들고 계속해서 가꾸어가는 곳이었군요. 언제나 끝이 시작인 이문재 시인의 나무(‘지금 여기가 맨 앞’)가 떠오르네요. 견고하지만 언제나 지금 여기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나’이기 때문에 ’타자‘가 아니라 ’우리‘가 되어갈 수 있는거겠지요. 헤르만 헤세의 ‘유일무이함으로 영원성을 드러내고 보여주는 직분’을 가진 나무와 이문재 시인의 ‘확고하지만 주변에 맞춰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가꾸어가는’ 나무가 닮아있음은 저만 느끼는 착각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