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매우 동의하지만 매우 동의하지 않는
“지금 하고 싶은걸 참고 해야할 일을 해야 나중에 니가 하고 싶은걸 할 수 있는거야”
‘맞는 말씀인데 틀려요‘
울컥. 왜 공부해야하는지 알고 있지만 꼭 이런 말을 입밖으로 내놓고 싶은 심정.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또 누군가는 다른 생각을 하겠지요.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지. 너는 무언가에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또 누군가는 이럴겁니다.
“나는 적당히 성적도 받고 적당히 즐기면서 살거야. 그래서 지금은 공부에 조금 더 집중해.”
이들 중 누구도 각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겁니다. 그러면서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사람도 없을것이구요.
동의하는데 동의하지 않는 모순. 우리가 살아가면서 거의 모든 순간에 처해있는 입장일 겁니다. 저는 변영주 감독의 글을 읽으면서도 매우 동의하지만 매우 동의하지 않는 모순적인 느낌에 사로잡혔습니다.
좋은 사회에서 좋은 영화가 나옵니다.
한 사람의 힘을 믿어야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답에 따라 관계가 달라집니다.
매우 동의합니다. 그리고 매우 동의하지 않습니다.
좋은 영화들이 많아야 좋은 사회로 나아갑니다.
한 사람의 무력함과 소중함을 알아야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질문에 따라 답이 달라집니다.
아니. 아닙니다.
영화들과 사회들, 그리고 개인들은 상호작용합니다.
한 사람은 사회를 반영하고 사회는 사람들을 반영합니다.
질문과 답은 연쇄적으로 사람이 나아가는 방향에 영향을 줍니다.

# 우리 사회가 점묘화라면
어쩌면 우리 사회는 색을 섞어서 그려내는 그림이 아니라 점묘화처럼 존재하고 점묘화처럼 감상하는 대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각각의 점을 찍고 그것을 멀리서 보면 각각의 색이 혼합된 것처럼 감삳하는 점묘화 말이지요. 색을 혼합하면 섞을수록 어두워지지만 점묘화는 그보다 더 밝은 색감을 구현해냅니다. 우리가 2017년 각자의 밝음과 어두움을 품은 채로 거대하면서도 밝은 결과를 이뤄냈던 것처럼요.
어느 한 개인은 사회를 대표할 수 없고 사회는 개인 각각을 그대로 투영하지 않습니다. 그저 상호작용하면서 ‘함께‘ 존재할 뿐입니다. 어느 한 영화가 그 사회를 대표할 수 없다는 건 너무나 명확합니다. 일색의 영화만 배출하는 사회는 없으니까요. 변영주 감독의 주장들은 매우 제 취향이어서 매우 동의하지만 그래서 매우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 사회는 저의 사회가 아니니까요.
한 폭의 그림 안에 존재하기에 의미를 가지는 점들이면서, 각자 존재하기에 한 폭의 그림을 밝힐 수 있는 관계. 그런 개인이 많아질 때, 우리 사회가 더 밝아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점묘화로 존재하고 감상할 수 있으려면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어야 하겠습니다.

# 다름과 충돌이 같은 질문을 공유할 때
여리지만 강인했던 윤동주의 시구처럼 우리 모두가 어진 사람들은 아닐지 모릅니다. 손목을 잡기란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반드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이견을 외면이 아닌 충돌로 이어갈 때 우리는 공동선을 향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공동선은 같은 답이 아닌 같은 질문을 공유할 때 시작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나와 다른 답을 내는 사람이라도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글을 쓰면서 문득 영화 < 세 얼간이>가 떠올랐습니다. 영화를 처음 보며 친구들에게 자신감과 행복을 찾도록 이끄는 혁명가 란초에 너무나 공감하고 몰입했습니다. 거듭해서 볼수록 체제를 이끄는 바이러스 교수와 체제의 열혈 앞잡이 차투르의 기반이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란초일 수 없고, 란초여서도 안되는 것이 사회입니다. 거대한 회사들이 양적 한계에 부딪히면 기존 사업을 확장시키는 사업체와 혁신을 이글 사업체를 새로 설립하여 분리하는 것처럼 합리적 보수와 성찰적 진보가 적당한 시기에 적당히 잘 어우러지고 난국을 타개해가는 것이 반복되면서 사회가 진화하는 것이 아닐까요. 유명한 진화론자 스티븐 제이 굴드의 말과 덧붙인 글귀로 맺어야겠습니다.
진화란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다.
우리 인생은 위가 아니라 계속해서 바뀔 수 있는 ‘앞‘으로 나아가는 시공간에 존재한다.
그리하여 언제고 같은 공간으로 돌아오거나 그 곳에서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다른 ‘시공간‘속에서 마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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