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쌤 이야기/ㅅㅌㅅㅌ 이야기

[쌤일기] 라면 차별주의자?

 

 

  "앆!"

  점심으로 라면을 먹다가 혀를 씹어버렸습니다. 비명소리가 절로 나오는 아픔이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뭐 대단한 걸 먹느라고...'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라면이 무슨 죄라고. 맛있게 먹던 라면에게 미안한 마음이 슬며시 올라옵니다. 44억원이라는 뉴 올리언스 아르노 레스토랑의 '딸기 아르노'를 먹다가 혀를 씹어도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흔히 고급 음식의 하나로 회자되는 송로버섯이나 캐비어 같은 음식을 먹다가 혀를 씹더라도 이런 생각은 안 들었을 것 같습니다. 경제적인 가치, 영양학적인 가치, 예술적인 가치, ...... 음식에도 이런 가치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필 라면을 먹을 때, (그것도 제 실수로)혀를 깨물어 아픈 순간 이 음식의 가치를 평가절하해버린 제가 오히려 조금 무가치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가 맛있게 먹을 수 있고 생명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충분히 만들어 내는 라면의 가치는 분명 대단하며 소중합니다. 그 대단한 걸 먹다가 실수로 혀를 씹었다 한들 그 가치는 여전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치있고 소중한 존재라고 합니다. 교사로서 아이들 역시 그렇다고 합니다. 돈이 많든 적든, 직업이 미치는 영향이 많든 적든, 성적이 좋든 나쁘든, 예의가 바르든 없든 그렇다고 머리로 생각합니다. 문득 내게 작은 상처가 오는 순간 그런 가치는 순식간에 내려가버립니다. 그 작은 상처에 내 진심이 드러나는 순간들을 많이 겪습니다. 아이들 역시 교사를,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그렇게 대합니다. 뭐 좋은 거라고 그걸 저도 하고 있습니다. 알고보니 저는 '라면 차별주의자'였습니다. 조금 큰 상처에도 라면의 가치를 깎아내리지 않을 수 있도록 이런 차별주의를 마음 속 깊숙이, 표정 깊숙이 숨겨봐야겠습니다. 사라질지 어떨지 모르는 그 차별주의가 되도록 나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특히 아이들을 만날 때 말이지요.

  그렇게 번 시간과 기회를 이용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함께 할 때 좋을지로 바라볼 수 있는 '라면 차이주의자'가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다른 건 단지 다른거니까요.


  최근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깊은 인상을 남기는 작품을 만났습니다. 김초엽 작가의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실린 <스펙트럼>에는 말도 통하지 않고 아무것도 주는 것이 없는 나약한 외계의 개체 ‘희진’을 조용히 보호하는 ‘루이’라는 개체가 나옵니다. 그리고 수명이 매우 짧은 그 ‘루이’의 시체는 강 건너로 보내지고 새로운 ‘루이’가 건너오면서 또 다시 ‘루이’가 됩니다. 새롭고 다른 ‘루이’는 어느 순간 앞선 ‘루이’와 비슷한 존재가 되어 ‘희진’을 대합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던 ‘희진’은 어느 순간 ‘루이’가 그리던 그림이 사실은 색채로 된 그들의 언어이자 기록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루이’는 그 기록을 보고 난 후 이전 ‘루이’와 같은 모습이 됩니다. 이렇게 ‘희진’은 ‘루이’의 조용한 ‘배려’를 느낍니다.
그리고 지구로 돌아온 ‘희진’은 지구인들로부터 그들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침묵’을 행합니다. ‘루이들’이 ‘루이’가 되어 ‘희진’을 대하는 그 모습은 수많은 다름 속에서 우리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태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으로 우리 ‘인간들’이 ‘인류’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희진에게 남은 유일한 흔적인 기록에 남은 ‘루이’의 기록은 그 상징성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그는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다.”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김초엽) 「스펙트럼」 중

일상 속에서 수많은 색채로 둘러쌓인 우리는 짧지만 그 색채들만큼이나 다채롭고 신비롭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태도를 갖출 수 있을 때 그 색채들이 아름다울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할 뿐입니다.

이토록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 앞에
내가 취할 수 있는 행위는
조용한 ‘배려’와 그를 위한 ‘침묵’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