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가 기억하는 시, 시가 기억하는 우리(<창작과 비평> 2024년 여름호 수록. 주민현)
주민현 시인은 <창작과 비평> 2024년 여름호의 기고글 ‘우리가 기억하는 시, 시가 기억하는 우리‘에서 위와 같이 고백한다. 그에게 시의 세계는 ’아주 먼 저기‘로 보내주는 소설의 세계와 달리 언제나 ‘지금, 여기’로 데려다 주는 세계였다고. 한 번을 읽고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기가 어려워 다시 한 번 슬쩍슬쩍 넘겨보는 와중에 필자가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시의 함축성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꽤나 구체적인 세계를 그려주는 소설의 세계는 읽는 사람에게 상상의 여지를 상대적으로 덜 주게 된다. 더 많은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는 글들도 존재하지만 그것은 필자의 말대로 ’지금, 여기‘ 나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곳이 아닌 상상속의 세계일 가능성이 더 높을 듯하다. 함축적이기에 다른 이가 보여준 세계를 걷어내는 과정을 거쳐서야 나를 볼 수 있는 소설과 다른 독법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드러내는 것이 상대적으로 적은 시는 드러낸 것만 볼 가능성이 높은 소설과 달리 보이는 것을 끄집어 내야하고, 자연스럽게 ’내 안의 시공간‘에서 ’볼 것‘, 아니 ’보고싶은 것‘을 끄집어내게 된다. 그것이 설령 나의 과거라 하더라도 그것은 다시 현재의 나로 환기시킬만한 힘이 있다. 누구도 아닌 ’나‘의 과거이기 때문에.
역사는 시의 언어에서 사후적으로 체험되는 그 무엇이다
그래서인지 먼저 존재하는 시의 전통과 역사, 시간의 역사는 시의 언어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시의 언어를 통해 사후적으로 체험되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글 속 필자의 글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면이 있다. 처음엔 이게 뭔 소린가 싶었지만. 물론. 꿈보다 해몽일지도 모른다.(솔직히 말해서 필자가 좋아하는 여성 시인들을 소개하고 화려하고 풍부한 글의 향연 속에서 마음껏 즐기지도 못하고 출구를 찾지도 못하겠는 시간이었다. 특히 처음 읽을 때는. ^^;;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 예쁘다는 나태주 시인의 ‘너’ 같다고나 할까. ‘너’. 예쁘기는 한데 그래도 다 예뻐 보이지는 않는구나. ^^)
그래서, ’지금, 여기‘가 뭐라고. 어쩌라고. 시의 함축성은 꽤 효율적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무효과인 경우도 많다. 시를 통해 ’지금, 여기‘로 가져올만한 경험과 감각, 관점이 없다면 그 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가 가진 연대의 가능성은 필자가 말한 ’지금, 여기‘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 시가 우리를 연결해주는 ‘허브’가 될 수 있다면
이유가 무엇이든 읽는 사람 각자에게 자기의 세계로 연결해주는 것이 시라면 하나의 시를 통해 사람들은 각자의 세계에 접속하게 된다. 그리고는 다시 시로 돌아온다. 그러다 보면 얼핏 보이는 것과 달리 많은 것을 감추고 있던 그 시의 주변에 또 뭐가 있진 않을까 기웃거리게 되리라. 그렇게 다른 이의 세계와 연결될 통로가 조금씩, 조금씩 생겨나며 연대의 씨앗이 싹틀 수 있지 않을까. ‘연대’란 다른 존재와 나 사이의 공통점, 함께할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할테니.
네트워크 이론에서 ‘노드(node)’는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개별 요소를 뜻한다. 우리 학교의 인적 네트워크라고 하면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한 명 한 명의 사람이 노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링크(link)’는 노드간의 상호작용이나 연결 관계이다. 그리고 ‘허브’라는 것은 많은 노드와 연결되어 있는 노드를 뜻한다. 네트워크에 이런 허브의 존재는 각 노드간의 평균 연결 단계를 극단적으로 낮춰준다. 허브와 관련해서 더 재미있는 내용은 복잡계 네트워크 이론이 한창 뜨던 1990년대 ’케빈 베이컨 게임‘을 찾아보면 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2004년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실험을 해 본 사람들이 있는데 전혀 모르는 우리나라 사람들끼리 무려 ‘3.6명만 거치면 한국인은 아는 사이‘이다. 만약 시가 우리 각자 세계를 연결해주는 ‘허브’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조금 더 강한 연대의 힘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언어 그 자체의 아름다움의 극대화’(이제니의 시), ‘울컥하고 멈추게 하는 힘’(최정례의 시), ‘삶을 다 주고서야 한줌 손에 쥐는 아름다운 문장’(진은영의 시), ‘직설적으로 뿜어져나오는 시적 에너지와 솔직함’(송경동의 시)같이 필자를 빠져들게 하는 시의 힘들은 거들뿐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가 느낀 이 힘은 필자의 ‘지금, 여기’이겠지.
어쨋든 우리가 함께 사는 사회에서 ‘연대할 희망’을 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거라 생각하니 마음 한 켠 위로가 되기도 한다. 니체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글을 읽으면서 나도 시인이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시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솟아나기도 한다.
시인은 언제나 자신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다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프리드리히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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